Cinema

프랑켄슈타인 National Theater Live 후기 백업

잉지뉴 2019. 4. 8. 23:52

 

 

 

'그것'- 베네딕트 컴버배치 / 빅터 프랑켄슈타인-조니 리 밀러

 

 

남성중심주의 시각의 재해석은 <새로운>이란 수식어를 앞에 붙여봤자 얼마나 눈물나게 뻔한가... 별 두개 짜리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랑 사운드트랙 배우들 연기(그리고 의상) 때문에 별 하나 반 더 줌. 극을 만든 시선이 새롭지 않으니 극 자체가 2019년에 새로이 선보이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게 구식으로 느껴진다. 초반의 제작자 인터뷰에서 드러난대로 영화에 의해 목소리를 뺏긴 괴물에게 원작에서처럼 목소리를 새로이 쥐어준 것. 그것도 상당히 지적인 층위를 가진 자아를 준 것은 높이 살 점이다. 창조주에게 질문하고 반발하며. 고뇌하는 자아. 이로써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인간 창조'는 완성된 셈이다. 문제는 이 괴물이 내는 목소리가, 철저한 사회 주류의 시선에. 억압받는 소수자의 느낌만을 덧씌운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연극이 가진 남성 시선의 한계를 지적하려면 어디서부터 입을 대야할지 모르겠다만 이게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결국, '여성 캐릭터'가 연관된 부분에서다. 우선 여성 괴물의 창조. 아. "여자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성격 특질 그런걸 어떻게 고려하나." 그 대사에서 짜증이. 생물학적 특징만 다르게 해주시면 됩니다, 좀.

여기서부터 극작가가 '여자'에 대해 잘 모르고 못 쓴다는게 티가 나더라.  여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거, 별거 아니다. '여자어' '여자의 섬세하고 특이한 특질' 따위에 대해 무지하다는게 아니다. 여자가 남자랑 다를게 조금도 없다는 그 너무너무 뻔한 사실. 그걸 몰라서 “여자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거지?”같은 대사씩이나 쓰고, 엘리자베스 캐릭터에 대한 비판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여자캐릭터를 ‘캐릭터’(목적)이 아니라 상황을 편리하게 굴리고 원하는 대사를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는거지...괜히 좋은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으로 남성 캐릭터를 창조한 뒤, 성별만 바꾸는 거라는 이야기가 있는게 아니다. 자꾸 '여성'이기에 갖는 특성을 부여하려 들면 외려 다른 성별이 갖는 편견이 어쩔 수 없이 반영되기 때문에 현실과 멀어진 캐릭터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이토록 짧은 대사에도 비춰진 한계는 보다 극이 진행되며 보다 명확해진다. 분명 괴물이 처음 요구한 것은 자기처럼 ‘동등히 흉측한’ 생물이었는데 이게 언제부터 갈라테이아 창조쇼가 됐는지. 조금 우스운건 분명 사회적으로 만연한 미의 추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비록 아가타를 아름다운 부인이라 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에 완전히 무지하다고 말할 순 없겠다.) 괴물도, 자기를 때려 죽여버리라고 말하던 아가타와 유사한 외형을 가진 반려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건지. 아름다운 신부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천사같은 나의 이브 운운하며 기뻐한다. 그래. 이 역시 괴물이 너무도 외로워 자신의 고통(괴물의 흉측한 외형이야말로 그가 겪는 고통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데도!)을 배우자가 공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해봤다고 쳐 주자. 하지만 완성된 여성 괴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사랑의 감정을 토로하는 괴물의 모습은...글쎄. 데라세 영감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누덕누덕하고 흉한 모습의 여성 괴물과 애틋한 춤을 추던 그 장면과 너무 대비되긴 하더라.

여담이지만 극에서 아주 짧게 등장한 대사에서 스친 생각인데. 그런거나 슬슬 나왔으면 좋겠다. 원작과 달리 빅터는 약속대로 여성 괴물을 소생시키지만. 이 여성 괴물은 제가 창조되기 전에 체결된 불공정한 협상에(이걸 이 극에서 언급했단게 좀 웃긴 포인트.) 거부해 창조주(아버지)와 아담(남편)에게서 벗어나 자아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그런 스토리. 2019년인데. 프랑켄슈타인을 리메이크한 작품이 전세계에 한둘이 아닌데. 아무도 이런 기본적인 탈가부장, 인형의 집 스토리 라인을 이 불후의 명작에 적용해 볼 생각을 안 했다는걸까. 일단 신선하잖아. 

그리고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 그런지 취급이며 캐릭터 빌딩이 처참한 수준이었다. 빅터에게 나도 네가 아는 것들을 알고 싶다고 난 교육의 기회가 없었을 뿐이리고, 로마 파리 미국에 가보고 싶다 말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돌아와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캐릭터가 줏대 없는걸 넘어서 주관이랄게 없고 상황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어진 대사만 치는 느낌. 남자들이 문명과 오만을 상징하고 여자들이 섭리와 자애를 상징하는 구도에도 질린지 오래라 그나마 엘리자베스가 대변하는 듯한 가치도 신선하기보단 그걸 이야기 하고 싶어서 별 설명도 없이 캐릭터가 그렇게 아이에 집착하게 했냐? 싶기도 하더라고. 그리고 강간씬.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괴물과 극이 같이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괴물이 타락해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싶었던것 같은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나. 그냥 ‘저열한 인간 남자’가 되었을 뿐이잖아. 일리아드나 영웅전의 야만적인 서구 영웅(남자)들을 인간의 스탠다드로 두는것좀 그만해. 이 순간부터 괴물에게 이입할 수 없게 되었다. 단지 기만(거짓말)에서 끝나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엘리자베스를 그저 살해하는 것으로 복수를 저지르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여기에 원작에도 없는 강간을 묘사했나. 살인은 괴물이 여러번 저질렀으니 더 강한게 필요하다고 생각이라도 한걸까? 아니면 그 현장을 목격하게 함으로서 빅터의 복수심을 더욱 부채질하려고? (만일 그렇다면 이는 더 나쁜 결단이라 할 수 있겠다) 좀 불쾌한 이야기지만. '강간'은 역사적으로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죄로 여겨지지 않았나. 괴물이 목소리를 갖게 된 이상. 고뇌하는 그를 지켜보며 인간의 사악한 면모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이입하게 하는 것이 내가 이해한 창작자의 의도인데. 이 윌리엄이나 데라세 일가의 살해와 달리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었기에, 외려 나는 그 순간에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해 공포를 느꼈다. 여기서부터 괴물은 컴버배치의 표현대로 endearing한 존재가 더는 아니게 된다. 이입과 성찰의 통로가 일부 차단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기에 현실에 실존하는 장애인 남성의 비장애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겹처보여서 정말 괴로웠다. 창작자의 의도대로 현실을 상기시키며 의미를 확장시키는게 아니라, 단지 세심하지 못한 발상으로 인해. 우연히 현실과 불쾌하게 오버랩되는 느낌.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또 ‘자애로운 포용자’와 ‘죄 없는 희생양’ 역할과 남자를 파멸시키기 위해 여자를 범한다는 클리셰를 그대로 수행하구 있고. 살아서는 완벽한 아내 죽어서는 딸기같은 입술에 부드러운 가슴의 여인으로 언급되는 엘리자베스를 보면 이 극이 철저히 남성의 시각에서 쓰였음이 드러나지 않나. 여자는 갈등에 '연루'되는 존재. 그 갈등 요소들 중 하나. 그러나 결코, 칼날의 양 선상에 남성과 동등하게 선 적 없다. 

물론 이 남성중심적 시각은 몰입을 방해하고 특정 부분에선 불쾌하게 만들기까지 했지만. 흥미로운 지점들도 분명 존재한다. 어제 본 사바하가 떠오르기도. 물론 사바하는 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을 바라본다면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어떤 우주적 힘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고 작품 안에서도 주인공은 반복적으로 신을 부정하며 인간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 능력’으로 자연에 도전하고자 한다. 둘다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이 파멸하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물론 이건 극의 해석이 특별히 흥미롭다기보단 메리 셸리의 원작이 가진 포인트이므로, 이로 인해 극에게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다. 

우리 모두가 사라져도 남아 있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 찬가이자 동시에 경고인 원작. 단촐하지만 힘있는 무대와 압도적인 사운드트랙.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그러나 이처럼 좋은 재료들을 썼다면 이것보다는 새로워야 했다. 이것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