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BOY. RUN.
우선 이걸 영화관에서 봤음에 감사...뉴유니도 그렇고 그냥 재밌대! 해서 무턱대고 영화관 찾아간 것들에 더 크게 감동받고 가슴떨려하는듯 아무튼 잘 매끈한 차체만큼이나 잘 빠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RPM은 수학문제집 피트는 사람이름 자동차는 예쁘고 볼일이고 페라리는 빨간색이 최고 포드는 개츠비네 차! "이게 자동차에 대한 지식의 전부인 사람이고 이걸 보러 간 이유는 단지 우연히 본 단 하나의 후기가 이 영화를 '미친듯이 재밌다'고 평해서였다. 당연히 줄거리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그래도 제목이 쩌렁쩌렁하게 외쳐준 덕에 포드랑 페라리가 한판 붙는 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긴 해) 워낙 차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보니 주인공들이 하는 이야기의 80%를 '음...그래 너네 뭔가 절박하고 진지하구나' 이렇게 패스하가며, 거의 뭐 순혈 문과가 인터스텔라 보듯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가슴 떨리게 재밌더라. 그 증거라 할만한게 요새 집중력이 떨어져서 웬만큼 긴 영화에는 집중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보를 알아보고 나서야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반에 육박하게 길다는걸 알게 됐다. 그 긴 시간을 체감조차 못할 정도로 전체적으로 지루한 부분 없이 매끈하게 뽑혔다는 소리. 그렇지만 마냥 산뜻한 오락영화로 넘기기엔 뒤에 이르러 목넘김이 따가운 부분이 있어 콜록거리게 된단 말이지. 마지막에 마일스의 죽음이나 그 후 남겨진 사람들의 일상을 꼭 보여줘야 했을까...싶다가도 그 또한 한 사람의 생의 마지막이니까. 이게 단지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켄의 삶을 조명하기도 한 영화고. 최후반부의 장면들이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특히 배우들 인터뷰를 읽어보니, 켄과 그의 가족들을 비춰주고. 그에 비해 캐롤의 삶은 상당히 절제해서 보여줬다고 하던데.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중 좀 더 '메인'에 해당하는게 있었다면 그게 바로 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감독은 내도록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속에는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웠던 그 장면들을. 온 마음을 다해 차를, 차와 함께 달리는 것을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것으로 하여금 마지막을 맞이했던 켄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경쾌하게 내달리기만 하던 이 영화의 마지막에 짜넣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소 쓸쓸하고 무거운 결말조차도 이 영화의 폭발적인 재미를 반감시키진 못했다. 레이스 파트들만큼은 마리오카트 한번 해본 사람이라면, 나만큼 지독한 차알못이라 한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주먹을 꽉 쥐게 만들거라 생각한다. 아니, 외려 나는 그 상영관에서는 내가 제일 몰입을 깊게 했던 것 같다. 트랙에서 차 한대가 뒤집어지거나, 터지거나, 하여간 나가떨어질때마다 허업 헉 어억 하도 큰 소리까지 내어가며 숨을 삼키곤 했으니까. 더 빠르게, 라는 가장 단순한 인간 욕구가 몰입을 본능적으로, 폭발적으로 이끌어내서이지 앟을까. 그리고 사운드트랙도 외따로 기억에 남을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매번 멋지게 보조를 맞춰줬다. 묵묵히, 멋지게 역할을 잘했어 마치 영화 속의 엔지니어들처럼.
+추가. 계속 듣고 있으니 마음이 바뀌었다. 충분히 멋진 사운드트랙이다. 특히 <Le mans66> 트랙은 "7000+ LIKE HELL" 이 문구가 떠올라서 계속 가슴이 뛴다. 한동안 마일스의 하강=상승 씬이 생각나서 너무 심박수가 빨라진다는 이유로(...) What's up danger를 못 들었던게 떠오르기도 하고. 여운이 좋은 영화에서 사운드트랙이 하는 역할은 과연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빠른 비트나 점점 속도를 올려가는 레이싱카가 내는
또 하나 소소한 관람의 재미는 60년대의 분위기가 영화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50년대가 여즉 매달고 있던 구시대적인 느낌쯤은 가뿐하게 떨치고 내달리는 유쾌한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는 것. 세계대전의 언급도 그렇거니와 존 번셀이 맡은 리 아이오코카가 초반에 한 프레젠테이션이 이미 '최초로 주머니에 제가 번 돈을 꽂은 열일곱살들'이 부상하는 베이비붐 세대. 자극적이고 빠르고 섹시하고 세련된 것들을 추구하던 60년대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때려박아주고 지나가지 않던가. 화면도 최선을 다해 레트로 무드를 위시한다. 바랜듯 노르스름하면서도 원색이 강하게 돋보이는 색채라던가. 주인공들과 엑스트라들이 입고 등장하는 가벼운 원피스 바이시클 팬츠 피케 셔츠, 알록달록한 헤어밴드라던가 개성적인 색의 클래식 카들이라던가… 그리고 스토리상 60년대의 이탈리아가 잠깐 나오는데. 팝 소다 같은 미국과는 사뭇다른 그 분위기 대조가 재밌다. 우리가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한동안 돌테 앤 가바나의 커머셜들에서 자주 묘사한) 한껏 관능적으로 느긋한 우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래주의적인 그림이 걸리고 창 밖으론 온대기후 식물들이 보이는 페라리네 사무실이 띈 분위기도 무게를 잡으려고 애쓰지만 뭔가 투박한 포드네 것과는 달랐고. 그리고 이탈리아인들 특유의 여유와 자부심 묘사마저. 이 분위기를 잘 녹여낸 사운드트랙이 <Ferrari Factory>인듯. 쓰다보니 이탈리아 칭찬을 실컷 해댄것 같은데, 변명을 하자면 총대를 맨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영화 자체다. 아니 감독님. 이렇게 한껏 이탈리아 띄워주다 맨 마지막에 무슨 <대부>마냥 묵직하게 경의를 표하는 엔초 페라리의 모습까지 넣어주면 어떡해요. 이쯤되면 미국영화가 아닌것 같은데. 이탈리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 깨알같이 재밌는 부분이라면 포드네 차는 정말 못생겼고 거기 맞서는 페라리네 차는 정말 아름답다. 바디니가 몰던 21번 페라리는 지금 생각해도 그 놀랍도록 미래적이고 과감한 유선형 디자인에 빗댈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하게 새빨간 차체가 눈 앞에 아른거려서 군침을 삼키게 되는데. 슬프게도 GT40은... 하늘색이란 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중간에 엔초 페라리가 포드더러 "못생긴 공장에서 만드는 못생기고 쪼그마한 미국 차!’라며 신랄하게 비난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반박하기 어렵지 않나(ㅋㅋㅋ) 중간에 잠깐 나왔던 머스탱도 미국 미감의 그것. 비계덩어리라는 표현은 아무렴 너무했지만 내 눈에도 매끈한 맛이 없긴 했어.
크리스찬 베일이 이걸로 아카데미 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다길래 에엥? 이런 영화로? 라며 의아해했는데(인정하자면 연기 노미네이트는 례-술 영화로 되는거란 편견이 있다.) 영화관에서 걸어나올땐 수긍하고 있었다. 그가 켄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정말 눈물나는 애틋함이 있었다. 정말…정말 그냥 차를 모는걸 사랑하는거 같아. 정말 간절한거 같아. 처음엔 무능한 가장 주인공 클리셰를 담당하는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그 순수함이 사람을 끌어들인다. 눈빛. 그 눈빛. 전에 <파에드라>(1962) 감상을 읽다 "단 한 점의 극단도 여지도 남기지 않고 사랑으로 소멸해버리는 일생을 사는 존재는 불행한 걸까, 행복한 걸까." 이 문장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을뿐 딱 켄 이야기가 아닐까. 무엇 하나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를 베일이 정말 잘 묘사한듯. 하지만 저 파에드라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마일스의 답은 준비되어 있다. 아들보다 더 크게, 목청껏 천진하게 부르던 노래의 가사가 단순하고도 명백하게 제시하지 않는가. H-A-P-P-Y. 그리고 7000rpm의 순간. 그는 셸비가 한때 있었던 그 순간 속에 있음을 그 눈빛을 보고 알았다. 르망의 골인지점은 여즉 떨어져 있었지만. 마일스의 골인 지점은 그곳이 아니었을까. 순수한 드라이버. 오로지 달리기 위해 태어난 것 같던 마일스는 그렇게 달려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보는 나는 속이 쓰려 견딜 수 없었지만, 기어를 낮출때 그는 의연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것이 이 영화에서 셸비와 더붙어 그를 잘 아는 몰리였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는 켄이 위험하거나 힘들어하는 순간이 올때마다 켄보단 몰리 걱정이 앞섰는데 생각해보면 몰리는 켄을, 그의 사랑과 순수한 집념을 잘 아는 사람이니 그를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건가 싶기도 하면서. 무슨 마음이었을진 아직도 가늠이 안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에도 셸비보단 끝까지 누구에게도 한점 원망 없이 의연한 몰리 모습이 더 눈에 밟혔다.
아. 그리고 켄이 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새삼 깨달은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들 피트와 활주로에서 나누던 대화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싶다면 어디가 한곈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와 닿더라. 정말로 그것을 사랑한다면, 최선을 다해 달리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그것을 가엾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차를 나로 치환한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메세지가 아닌가. 레이스에 대한 영화지만, 재밌게도 이 영화가 거푸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골인 지점. 1등의 영광, 맹목의 질주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달려서 얻고자 하는 것은 우승컵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롯이 나만이 존재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 그 단 하나의 거대하고 궁극적인 질문에 이르게 되는 7000rpm의 순간.
상관이 있는듯 없는 잡담들
-놀란형제는 취향이 비슷하구나 베일 머리 짧게 깎으니까 카비젤 닮아서 놀랐음ㅋㅋㅋ
-셸비의 야바위꾼스럽고 입담 좋은 면모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근데 이렇게 현란하게 입 놀리는 멧 데이먼이 99년의 쮜질 리플리였단거 생각하면 자꾸 놀라고(한편 99년의 그린리프는 지금은 교황이 되어있는데 말이죠)
-베일은 노빠꾸맨이 틀림없다 몇년 전에 트위터 시작하고 'Hello world' 트윗을 올린지 얼마 안되서 나 트위터랑 안 맞는듯ㅇㅇ이 한마디를 남기곤 10년이 넘도록 사이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일화도 충분히 웃겼는데 이번에 시네 21이랑 한 인터뷰에서도 얼마나 빨리 달려봤냐는 질문에 132km 였나? 아무튼 그 이상은 보험이 허락을 안 했다고 딱 잘라 말하는것도 너무ㅋㅋㅋㅋ아 이아저씨 진짜 웃겨
-레이스를 보고 싶다가도 누군가는 죽을수있단거 모두들 어떻게든 상대를 추월하려는 동시에 뒤에서 바짝 쫓는 죽음보다 빨리 달리려고 하고 있단걸 생각하면 그걸 보다 내가 혼절할것 같음 보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만큼 강심장인듯. 이게 얼마나 위험한 스포츠인지. 내가 마일스의 우승컵을 뺏아갔다며 도끼눈을 뜨고 흘기던 맥라렌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행중에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는걸 읽고 새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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